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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이런저런 이야기

마가복음 4장 40절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WBC주석)

by [PRO]HYUN 2022.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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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으냐?"(우포 에케테 피스틴)는 마가 특유의 "이중 질문"의 두 번째 부분이며, 아마도 첫 번째 질문의 확장일 것이다. 폭풍의 위험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데이로이)은 그들의 믿음의 부족을 노출시켰다. 그러면 여기서 "믿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디벨리우스는 믿음을 "기적 행하는 자의 능력에 대한 신뢰"로 정의한다. 이런 해석은 4:40이 본래의 전승에 속한 것이라고 추정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디벨리우스에 의하면 "믿음"의 이러한 용법은 4:35-5:43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수집록의 특징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기사와 후속 기사의 취지는 예수를 "그 어떤 마술사보다도 뛰어난" "위대한 이적을 행하는 존재"로 부각시키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적어도 4:40의 두번째 질문이 마가의 편집적 처가 부분이며, 마가가 "믿음"을 "기적을 행하는 자의 능력에 대한 신뢰"라고 정의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믿음이 "예수 안에서 임재하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뜻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질문은 폭풍의 위험에 대한 제자들의 두려움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부재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4:41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제자들의 반응은 실제로 예수의 질문에 부정으로 대답하고 있다. 예수께서 누구이신지를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적어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과 동일한 의미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제자들의 보습을 지나치게 연약하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 대한 마가의 묘사의 관점에서 볼 때 4:41의 핵심을 왜곡하는 것이며, 제자들에 대한 마가의 묘사의 관점에서 볼 때 4:41의 핵심을 왜곡하는 것이며, 질문을 시작하는 우포를 정당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아직 ~이 없느냐?"는 예상되어지는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기대의 이유는 제자들과 예수와의 관계를 통하여 자기들을 구별하고 있는 문맥들에서 제자들에 대한 마가의 선행 언급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의 부족을 보여주는 일련의 질문들을 4:13에서 시작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 부족은 예수의 비유로 가르치심과 예수의 이적들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의 부족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문제 삼고 계신다.

 

그러나 이곳과 4:13의 예수의 질문 사이의 차이, 한편으로 믿음에 대한 강조와 다른 한편으로 이해에 대한 강조는 본질적이라기보다 표면적이다. 첫 번째, 6:52과 8:17에 나타난 제자들의 이해의 결여는 그들의 우둔함에 기인하기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지니게 하는 "마음의 완악함"에서 기인한다. 두 번째, 이 이적 기사는 선행 비유들(4:3-32)의 핵심적 진리, 즉 표면적인 대조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예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사에서 제자들의 행동은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 모든 것을 해석하여"(4:34) 준 후에도 비유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4:13)을 예증한다

 

폭풍에 대한 제자들의 두려움이 예수께 대한 그들의 신뢰와 예수께서 그들을 돌보실 것이라는 확신(4:38)을 상실케 했다. 그들의 두려움은 사나운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자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의 결여를 반영한다. 예수의 질문은 그들의 두려움이 근거 없는 것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이 이적에 대해서는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이 폭풍우 동안의 예수의 침착함에 반영되어 있었다.

 

제자들에 대한 마가의 묘사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부르심과, 예수와의 관계와 심지어 따로 특별교육을 받기까지 했던 제자 집단과, 동시에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때때로 예수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으로 비난받고 있는 집단 사이의 긴장은, 마가가 제자들을 예수와 그의 선교를 거절한 "불신자들"로 생각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때때로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방법을 인식하지 못하고 "외인"들과 같은 반응을 예수께 보이고 있다(4:13, 40; 8:17-21).

 

종종 추정되는 것처럼 마가가 제자들에 대한 이 복합적 묘사의 창시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승에서 발견된 경향을 부각시키려는 것 같다. 비난의 의미가 담긴 예수의 질문들은 제자들이 비유를 계속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4:10의 전승적 질문에 내재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느냐는 4:13에서 논의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마가가 4:41의 제자들의 반응에 기초하여 제자들의 "믿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에 관한 질문(4:40)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앞에서 말한 것처럼 3:7, 9-10의 장면이 이 기사보다 먼저 발생했다면, 익명의 그룹의 예수에 대한 이해의 실패가 아니라, 바로 제자들의 이해의 실패(4:41)가 이미 전승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에 관한 이 문제를 첨가함으로써 전승에서 암시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명시하고자 햇다.

 

아마도 마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의 비밀스런 임재를 이해하려는 자신의 공동체의 갈등에 대해 말하기 위해 제자들의 반응의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했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마가가 부활 후의 주님의 부재, 지연된 재림 혹은 묵시적인 재앙들을 경험함으로써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가가 이런 의미로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과 제자도를 통하여 세상에서 어떻게 역사하셨으며, 지금도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가를 현실과는 정반대되는 관점에서 파악했던 공동체의 갈등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들의 두려움은 그들의 신앙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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