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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이런저런 이야기

예배에 대한 생각 그리고 물음

by [PRO]HYUN 202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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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 속에 종교행사에 모이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요청과 공무원들의 방문, 그리고 공문 속에 여러 반응을 경험했습니다.

그 반응에 대한 많은 신학적 고견을 접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언제부터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했는가, 교회역사 속에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말씀하시는 분들보다 가방끈도 짧고, 가방의 크기가 작고, 깊이도 얕은 일개 부목사이기에 섵불리 생각을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음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럼 가시적 교회는 왜? 있는 것일까?

 

여기서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코로나 확산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섬기는 교회가 주일예배 뿐 아니라, 새벽예배, 수요예배, 저녁예배를 모두 드리고 있어서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 맛있는 나물밥을 먹고, 교회로 교역자님들과 돌아왔습니다.

평소라면 교회 카페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한잔했는데, 코로나 확산이후, 교회 카페는 닫았고

텁텁한 입안을 정돈하기 위해 교회 옆 상가에 있는 카페에 갔습니다.

회사주변도 아닌 주택가에 있는 카페는 평일 비오는 날인데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두 마스크를 벗고, 침튀기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회용 컵을 못쓰게 정부에서 단속을 해서 모두 컵을 쓰고 있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우와~ 확진자가 오는 것이 두려워서 교회까지 닫으라고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밀폐된 곳에서 확진자가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컵을 사용하고 있네, 이 믿음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교회에 오는 믿음보다 카페에 오는 믿음이 더욱 담대하게 느껴지는 현실 앞에 먹먹함을 느꼈습니다.

 

이번 주일에도 구청과 동사무소 공무원들은 교회에 방문에서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가고,

예배중에는 재난 문자로는 우리 지역도 아닌 성남시청에서 발송한 종교행사 자제 메시지가 연속해서 두번이나 왔습니다.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은 정부의 함께 위기를 극복하자는 의도에 따르지 않고, 독선적인 종교행위에 집착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목소리에 힘이 있는 예배학자는 지금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이때를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해 제2의 신천지 모양이 된다면 우리 교회는 사회의 신뢰와 존경을 크게 잃고, 온전한 예배 회복에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에서 세습이나 사회적 비판의 문제들에 대한 부분에서는 목소리를 아끼시다가 코로나 확산 속에 예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면 지금이 참 중요한 시기인거 같기도 합니다.
(혹시 이야기 하셨다면 제 학식이 짧고 써칭 능력이 부족한 것이니 알려주시면 글을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예배학 교수 출신의 담임목사님이 계신 두 대형교회는 모두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결정한 것을 보면, 신학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카페에 와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교회에서 코로나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생각!

저보다 훨씬 예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신 분들의 결정 앞에 

 

그럼 매주 모여 예배하는 것에 대한 가치는 무엇일까?

 

매년 나오는 예배와 설교 핸드북이 있습니다.

여러 기준과 상황에 따라 매주 모여 예배하지 않아도 된다면, 구약에서 정한 절기와 사순절, 부활절, 대림절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지금 나오는 대안(代案, 어떤 안을 대신하는 안)들이 있습니다.

1주일에 한 번 모이는 주일 예배에 대한 대안, 수요예배에 대한 대안, 새벽예배에 대한 대안이 기존의 것의 같은 무게감을 갖고 있는 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학적으로 해석하며 기존의 잘못된 생각을 바라잡을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

오른손으로 밥숟가락을 들고 먹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생각 속에서 왼손잡이가 틀렸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몇 해전에 제주도의 기독교 역사를 국가에서 연구주제로 받고 연구하는 팀에서 보조연구원으로 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도종 목사님(1891∼1948)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일제 시대에 한국어로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하자, 예배시간에 앞에 나와서 침묵으로 시간을 채우고 영적으로 성도들과 교통하였다는 내용을 접했습니다.

 

다시 한번더 글을 남기지만, 절대로 온라인 예배 결정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적 교회의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고 우리 모두 불가시적 교회임을 선포했던 바울로 가는 곳마다 모일 수 있는 가시적 교회를 세웠고,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불가시적 교회의 모습이 아닌 가시적 7개교회를 모델로 땅의 예배를 설명했습니다.

 

또 언제 그랬냐는듯 우리의 일상은 돌아올 것이고,
지금의 결정이 후에 어떻게 자리맺김할지는 모르겠지만,

속해 있는 교회의 결정에 따르는 입장에서 글로 지금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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