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5
그가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실 때는 말 그대로 정말 온전하라는 것, 온전히 치료받을 마음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로지 추구하는 일종의 절충안을 따르기는 더 어렵습니다. 아니, 사실은 아예 불가능하지요. 알이 부화해서 새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이 나는 법을 배우려 드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일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우스운 광경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알과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평범하고 보기 좋은 알로 머물 수 없습니다. 부화하든지 썩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1.6
그리스도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착하기만' 하면 어리석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첫째로,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정말 관심 있는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분별력'을 발휘하며, 아주 지각 있게 사고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이 지적했듯이 그리스도는 지성의 영역에서 아이처럼 되라고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 아니라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바라시는 것은 아이의 마음과 어른의 머리입니다. 그는 우리가 착한 아이처럼 순진하고 한결같으며 정 많고 잘 배우기를 바라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지성은 어느 면에서나 그 임무를 다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최상의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기를 바라십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1.7
특정 부류의 악인들에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자기들이 포기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다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특별한 이유로 어떤 것 - 결혼이든 고기든 술이든 영화든 - 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는 순간, 혹은 그런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순간, 그는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절제(temperance)'란 말을 음주 문제에만 국한해서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큰 해악이 하나 있습니다. 음주 외에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똑같이 무절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골프나 오토바이를 자기 생활의 중심으로 삼은 남자나, 옷이나 카드놀이나 애완견에 온통 정신이 팔린 여자는 저녁마다 술에 취하는 사람만큼이나 '무절제한' 사람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요. 카드놀이광이나 골프광이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자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겉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1.8
믿음의 습관을 훈련하는 첫 단계는 사람의 기분은 바뀌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상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서 그 주요 교리들을 찬찬히 마음에 새겨 나가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교회에 나가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지속적으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는데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신념은 없습니다. 신념은 계속 북독워 주어야 합니다. 사실상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 100명 중 정직한 논쟁을 거쳐 추론한 결과 믿음을 버리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저 어쩌다가 믿음을 잃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내가 남긴 성경구절>
[히브리서 11장]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2 This is what the ancients were commended for.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8 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They wandered in deserts and mountains, and in caves and holes in the ground.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39 These were all commended for their faith, yet none of them received what had been promised.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40 God had planned something better for us so that only together with us would they be made perfect.
1.9
잊지 마십시오. 아기가 처음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는 젖 주는 사람이 어머니인 줄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도 처음 사람의 도움을 받을 때에는 그 뒤에 계신 그리스도를 못 보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아기로 머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정말 도움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안 된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사람을 의지하게 될 테니까요. 사람을 의지하면 곧 실망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실수를 합니다. 그리고 다 죽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도와 준 이들에게 감사해야 하며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에게도 절대로, 절대로 믿음 전체를 걸지는 마십시오. 설령 그가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렇게는 하지 마십시오. 모래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멋진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집을 짓는 일만큼은 해서는 안 됩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내가 남긴 성경구절>
[히브리서 3장]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2 He was faithful to the one who appointed him, just as Moses was faithful in all God's house.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3 Jesus has been found worthy of greater honor than Moses, just as the builder of a house has greater honor than the house itself.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4 For every house is built by someone, but God is the builder of everything.
1.12
사랑 안에 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친절이 동일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며, 사랑의 다른 요소들과 분리된 친절은 그 대상에게 근본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 대상을 경멸하는 사태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친절은 그 대상을 제거하는 일에도 서슴없이 동의합니다. 우리는 동물에게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면하게 해 주려는 목적으로 동물을 죽이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친절은 고통을 면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그 대상이 선해지든 악해지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지적하듯이, 응석만 부리면서 자라는 자식은 서자입니다. 가문의 전통을 이어갈 적자는 징계를 받습니다….이러한 사랑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단순한 친절을 넘어서는 분임이 분명합니다. 또 모든 기록을 볼 때, 그가 우리를 꾸짖고 책망하신 적은 자주 있었지만 우리를 경멸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장 깊고 가장 비극적이며 가장 불가항력적인 의미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황송할 정도로 극진한 대접을 해 주셨습니다. –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1.13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이기를 그만두시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본성상 지금 우리의 인격에 있는 흠들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그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전보다 좀 나아졌다 해도 여전히 불순한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해 주시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거지 소녀가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으면서도 코페투아 왕이 만족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나, 이미 인간 사랑하기를 배운 개가 야생동물처럼 벌레투성이에 더러운 몸으로 집 안의 아무 물건이나 물어뜯으면서도 주인이 너그럽게 봐주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주된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내가 남긴 성경구절>
[이사야 40장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개역개정)
The grass withers and the flowers fall, but the word of our God stands forever.(NIV)
1.14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것은 그가 그 필요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세상의 주된 존재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려는 데 있다는 그 사실은, 좀 더 깊은 차원에서 볼 때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한 것 하나 없는 그 분이 우리를 필요로 하기로 선택하신 것은, 그의 필요가 되는 것이 곧 우리의 필요이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을 택하여 사랑하는 자로 삼음으로써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이자 그가 갈망하시는 존재(어떤 의미에서)로 만드신 행위로써, 하나님은 영원토록 모든 선함을 가지고 계신 분이므로 이렇게 자신을 내어 주시지만 않았다면 아무 것도 필요로 하거나 갈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내가 남긴 성경구절>
[요한일서 4장]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0 This is love: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n 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6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1.15
우리는 모두 확고한 행복과 안전을 갈망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본성상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기쁨과 쾌락과 즐거움은 널리 퍼뜨려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안전하지 않지만, 풍성한 재미와 얼마간의 황홀함을 누립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이유를 알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갈구하는 안전은 우리 마음을 세상에 안주시킴으로써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깐 동안의 행복한 사랑, 아름다운 경치, 교향악, 친구들과의 즐거운 만남, 목욕, 축구경기에는 그런 성향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여행길에 기분 좋은 여관에 들러 원기를 회복하게 해 주시지만, 그 여관들을 우리 집으로 착각하게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 C.S.루이스 <고통의 문제>
1.16
하나님이 경우에 따라 물질의 움직임을 수정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 수정하기도 하시며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들을 행하기도 하신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세상, 따라서 안정적인 세상에서는 이런 예외적인 일이 극히 드물게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체스 게임을 할 때 자기 재량으로 상대방에게 양보해 줄 때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기적이 자연법칙에 대립되는 것처럼 평상시 게임 규칙에 대립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번번이 상대방의 형편에 맞추어 준다면 –언제든지 수를 물릴 수 있게 해 주고, 상대방에게 불리할 때마다 자기 말을 치워 준다면 – 게임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영혼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변하는 법칙과 인과적 필연성에 따른 결과 및 전체 자연질서는 일상의 삶을 제한하는 한계인 동시에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조건이기도 합니다.따라서 자연질서 및 자유의지와 맞물려 있는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1.19
제가 믿는 바 하나님은 어떤 시간 흐름에도 매여있지 않으십니다. 그의 삶은 우리의 삶처럼 한 순간씩 똑딱똑딱 흘러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는 지금이 아직 1920년이면서 벌써 1960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삶은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시간을 우리가 곧장 따라가야 하는 직선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직선이 그려진 종이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직선의 일부를 한 걸음씩 밟아갑니다. 우리는 A를 지나야B에 갈 수 있으며 B를 지나야 C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에서, 밖에서, 또는 사방에서 이 직선 전체를 품고 계시며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내가 남긴 성경구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1:8)
1.20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은 우리가 내일 할 일을 알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내가 내일 할 행동을 알고 계신다면, 나에게는 그와 다르게 행동할 자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이것 역시 하나님을 우리처럼 시간 흐름에 매여 사는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은 앞일을 미리 안다는 점에서만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입니다…하나님을 시간의 흐름 밖, 그 위에 계신 분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내일’이라고 부르는 날도 ‘오늘’처럼 보실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지금’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어제 한 일을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계십니다…그는 당신이 내일 할 일을 예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계십니다…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해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바로 이런 식으로 당신이 내일 할 행동을 아시는 것입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1.21
1차원의 세계는 직선입니다. 2차원의 세계에서는 직선도 그릴 수 있지만 여러 직선으로 도형도 만들 수 있습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는 도형도 만들 수 있지만 여러 도형으로 입체도 만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좀 더 현실에 가깝고 복잡한 차원으로 올라간다고 해서 그보다 단순한 차원에 있는 것들을 아주 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방식으로 – 단순한 차원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 결합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신적인 차원에도 인격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체들은 그 차원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즉, 여러분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세 인격인 동시에 하나인 존재를 보게 됩니다. 정육면체가 하나의 정육면체인 동시에 여섯 개의 정사각형인 것처럼 말이지요. 물론 지금 우리로서는 그런 존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2차원만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는 정육면체를 제대로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내가 남긴 성경구절>
[에베소서 2장]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1 In him the whole building is joined together and rises to become a holy temple in the Lord.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2 And in him you too are being built together to become 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by his Spirit.
1.22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그분께 자신을 드리면 드릴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다워집니다. 그리스도는 얼마나 크신 분인지, 저마다 다른 수십만 억 명의 ‘작은 그리스도’로도 그분을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가 제각기 다른 이 사람들을 창안해 내셨고 – 작가가 소설의 인물들을 창안해 내듯이 – 여러분과 저도 거기 속해 있습니다….저는 하나님 안에 여러 인격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진정한 인격은 오직 그 안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자아를 그에게 바치기 전까지는 진정한 자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천편일률성은 그리스도께 굴복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아니라, 가장 ‘자연적인’사람들에게 가장 잘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과 정복자들은 얼마나 지루하게 하나같이 똑같은지 모릅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얼마나 영예롭게 저마다 다른지 모릅니다. – C.S루이스...<순전한 기독교>
1.23
진정으로 자아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자신의 인격에 계속 신경 쓰는 한 여러분은 결코 그에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아를 통째로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새 자아는 그 자체를 추구하는 한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자아는 그리스도를 찾을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인간 관계에서도 자기가 상대방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있는지 신경 쓰는 동안에는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문학과 예술에서도 독창성에 신경 쓰는 사람은 독창적이 되지 못하지요. 반면에 단순히 진실만을 말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십중팔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창적이 되게 마련입니다…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매일의 야망과 이루고 싶은 바람들의 죽음을,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몸의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온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것입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내가 남긴 성경구절>
[마기복음 12장]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0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1.26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야고보서 1장 12절]
은혜를 받은 다음은 항상 시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서로 기도해주며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쉽게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된 시를 감상하는 즐거움은 그리스어를 배우는 사람에게 합당한 보상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어 실력이 시를 즐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사람만이 그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겨우 그리스어 문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학생은 연인이 결혼을 바라거나, 장군이 승리를 바라듯 소포클레스의 시를 즐기게 될 날을 간절히 바랄 수가 없습니다. 우선은 점수를 따기 위해서나 처벌을 면하기 위해, 혹은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니면 기껏해야 당장에는 상상할 수도 갈망할 수도 없는 미래의 유익을 기대하며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천국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처지가 이 학생의 처지와 상당히 비슷합니다.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목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천국이 뇌물 따위가 아니라 지상 제자도의 완성임을 아주 잘 알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상태에 이르지 못한 우리는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천국의 실체를 알 도리가 없고, 그것의 맛이라도 약간 보려면 계속 순종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 보상인 천국을 점점 더 간절히 바라는 자기 모습에서 순종의 첫 보상을 발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 C.S. 루이스 <영광의 무게> 中‘영광의 무게’
1.27
“배고픈 상태가 빵이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누군가가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그가 빵을 얻게 될 것임을 보증하지는 못합니다…하지만 사람의 굶주림은 그가 음식을 먹음으로 육신을 유지하는 종족이며 먹을거리가 있는 세상에 산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낙원을 향한 제 갈망이 앞으로 제가 낙원을 누리게 될 것임을 보증하진 못하지만(그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 갈망은 어딘가 낙원이 존재하며 누군가는 그것을 누리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썩 훌륭한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 C.S. 루이스 <영광의 무게> 中 ‘영광의 무게’
<내가 남긴 성경구절>
[누가복음 23장]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43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1.28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갑자기 기억났습니다. 칭찬받을 때 가식 없이 한껏 기뻐하는 것은 아이(으스대는 아이 말고 착한 아이 말입니다)에게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입니다…겸손에 대한 오해 때문에 저는 그 오랜 세월 동안 가장 겸손하고, 가장 천진난만하고, 가장 피조물다운 기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낮은(inferior)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짐승이 사람 앞에서, 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학생이 교사 앞에서,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누리는 즐거움입니다….그것은 도무지 바랄 수도 없고 믿기도 어렵지만, 구속(救贖)받은 영혼이 자신의 창조 목적을 성취하여 창조주를 기쁘게 해 드렸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될 때 벌어질 상황입니다….”왕의 칭찬은 잠자코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우리 등을 두드려 주시는 곳이라는 제 생각이 그리 맘에 들지 않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하지만 그 반감 배후에는 교만함에서 비롯한 오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 C.S. 루이스 <영광의 무게> 中‘영광의 무게’
<내가 남긴 성경구절>
루이스의 글에 조금 성서에서 말하는 어린아이의 개념을 설명하면
[마가복음10장]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5 I tell you the truth, anyone who wi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like a little child will never enter it."
현재적 의미에서 어린아이는 사회적 약자, 소외된 자를 의미합니다
즉 세상에 기댈것 없는자입니다
조금더 풀면 하나님외에 다른 것에도 기대지 않는 자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마태복은 5장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심령이 가난한 자외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기대어 화이팅하세요~~^^
1.29
자연은 필멸의 존재이지만 우리는 자연보다 오래 존재하게 됩니다. 모든 항성과 성운이 사라져 버린 후에도 우리 각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서로에게 합당한 경외심과 신중함을 갖고 모든 우정, 사랑, 놀이,정치 행위에 임해야 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없습니다.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그저 죽어서 사라질 존재가 아닙니다. 국가, 문화, 예술, 문명과 같은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그것들의 수명은 우리 개개인에 비하면 모기의 수명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농담을 주고받고, 같이 일하고, 결혼하고, 무시하고, 이용해 먹는 사람들은 불멸의 존재들입니다. 불멸의 소름끼치는 존재가 되거나 영원한 광채가 될 이들입니다. – C.S. 루이스 <영광의 무게> 中 ‘영광의 무게’
<내가 남긴 성경구절>
[이사야 40장]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8 The grass withers and the flowers fall, but the word of our God stands forever."
[창세기 1장]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7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8 God blessed them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s on the ground."
1.30
우리가 언제나 엄숙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놀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유쾌함은 처음부터 서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나누는 유쾌함이어야 합니다. 경박하거나 우월감을 갖거나 주제넘은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인은 사랑하되 죄는 더없이 미워하는 실질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유쾌함을 흉내 낸 경박함이나 사랑을 흉내 낸 묵인이나 방치는 안 됩니다. 우리의 오감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대상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이고, 그 다음은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 이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거의 성찬만큼이나 거룩합니다. 그 안에 참으로 숨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안에는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이자 영광을 받으시는 분, 영광 자체께서 참으로 숨어 계십니다. – C.S. 루이스 <영광의 무게> 中 ‘영광의 무게’
2.2
인간의 고통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에 하찮은 의미를 부여하며 인간이 만물의 중심인 양 만물을 바라보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우리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습니다. –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내가 남긴 성경구절>
[요한일서 4장]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6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7 In this way, love is made complete among us so that we will have confidence on the day of judgment, because in this world we are like him.
2.3
우리는 상대방의 필요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 필요를 만족시키는 인간의 사랑 – 자녀들로서는 세상에 나가는 편이 유익한데도 아버지가 그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집에 붙들어 두는 경우처럼 – 을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려면, 사랑하는 쪽에 어떤 필요나 열정이 있고 사랑받는 쪽에 그와 공존할 수 없는 또 다른 필요가 있어야 하며, 사랑하는 쪽이 사랑받는 쪽의 필요를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거나 무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는 이 조건 중 어떤 것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어떤 필요도 없습니다…하나님은 선이십니다. 그는 선을 주시는 분이지, 선을 필요로 하거나 어디서 얻어 와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말 그대로 본질상 끝없이 이타적인 것으로서, 모든 것을 주되 아무 것도 받지 않는 사랑입니다. – C.S. 루이스<고통의 문제>
2.4
타락한 우주, 부분적으로만 구원받은 이 우주에서는(1)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선, (2) 반항하는 피조물들이 만들어 내는 순수한 악, (3)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을 위해 그 악을 이용하시는 경우, (4) 그 결과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고난을 받아들이고 죄를 회개함으로써 증진될 수 있는 복합적인 선, 이 네 가지를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순수한 악으로부터 복합적인 선을 만들어내실 수 있다고 해서 순수한 악을 저지른 사람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을 수는 있어도 – 것은 아닙니다. 이런 구분은 아주 중요합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화가 임합니다. 죄는 확실히 은혜를 더하게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계속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 자체는 역사적 사건 중 최악의 사건인 동시에 최선의 사건이지만, 유다의 역할은 여전히 악한 것입니다. –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내가 남긴 성경구절>
[이사야 5장]
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7 The vineyard of the LORD Almighty is the house of Israel, and the men of Judah are the garden of his delight. And he looked for justice, but saw bloodshed; for righteousness, but heard cries of distress.
다들 평안한 밤 보내고 계신가요? 수요일밤쯤 되면
딱 시험들거나 죄짓고 싶은
욕구가 넘쳐날때죠
적어도 저는 그래요 ㅋ
다들 많은 걱정들이 있으시겠지만 지금 제가 듣고 있는 찬양처럼 하나님이 저희에 아버지가 되주시기 때문에
자식에게 나쁜것을 주시지 아니하시니 걱정하지 마시고 맡기면 문제는
당장 해결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주는 든든한 마음때문에 또 내일을 살수 있고 절망하지 않을수 있는것 같습니다 찬양듣다가 삘받아서 몇자 적어봅니다ㅎㅎ
다들 평안한 밤되소서~(브이)
<내가 남긴 성경구절>
[시 37편]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5 Commit your way to the LORD; trust in him and he will do this:
[시55편]
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2 Cast your cares on the LORD and he will sustain you; he will never let the righteous fall.
[잠16장]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3 Commit to the LORD whatever you do, and your plans will succeed.
[벧전5장]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7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2.5
어떤 자비로운 사람이 이웃의 유익을 위해 ‘순수한 선’과 의식적으로 협력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합시다. 반대로 어떤 잔인한 사람은 이웃을 학대하면서 순수한 악을 행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의 동의 없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악을 사용하여 복합적인 선을 만들어 내셨다고 합시다. 이때 첫 번째 사람은 아들로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고, 두 번째 사람은 도구로서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행동을 하든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처럼 섬기느냐, 요한처럼 섬기느냐가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전 체계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충돌을 고려하여 만들어져 있으며, 꿋꿋함과 인내와 연민과 용서의 선한 열매가 맺히려면 –잔인한 자들의 행동이 허용되는 것은 이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 대개는 선한 자들이 계속해서 순수한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2.6
금식은 의지를 발휘하여 욕망을 거스르는 일로서, 여기에는 극기라는 상급과 교만이라는 위험이 따릅니다…금욕 수행은 하나의 수단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혐오스러워집니다. 의지가 욕망을 대신하는 데 그침으로써, 동물적 자아를 악마적 자아로 교체하는 것에 불과해지기 때문입니다…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려면, 그렇게 복종시킬 의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며 그렇게 의지를 복종시킬 대상들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자기 부인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무감한 상태(Apathy)’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합법적인 목적들을 추구하되 하나님을 그보다 앞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자세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완전한 분이 ‘고난과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에 맞는다면 피하고 싶다’는 의지,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마음과 결합되어 있던 그 강력한 의지를 겟세마네까지 품고 가셨던 것입니다. –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내가 남긴 성경구절>
[이사야 58장]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2.9
만약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유형이라면 –좋은 일을 쉽게 하는 사람이라면 – 조심하십시오!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을 자기 장점으로 착각한다면, 그래서 자기가 호감을 주는 사람이라는 데 만족해 버린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반역자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선물은 여러분을 더 무섭게 타락시키고 더 심하게 부패시킬 것이며, 여러분의 나쁜 본보기를 통해 더 큰 재앙이 닥치게 만들 것입니다. 악마는 한때 천사장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타고난 재능이 침팬지의 재능보다 뛰어난 것 이상으로, 그의 재능은 여러분의 재능보다 뛰어났습니다. – C.S.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2.10
여러분이 ‘가난한’ 피조물이라면 – 저속한 질투와 몰상식한 다툼투성이였던 집에서 비참하게 자라 거기에 물든 사람이라면, 자기 뜻과 상관 없이 혐오스러운 성도착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라면, 밤낮없이 열등감에 시달린 나머지 제일 친한 친구한테조차 딱딱거리는 사람이라면 –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가 축복하신 가난한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형편없는 기계를 돌리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그러니 계속 노력하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십시오. 그는 언젠가(다음 세상에서일 수도 있고,그보다 훨씬 빠를 수도 있습니다) 그 형편없는 기계를 폐기처분하고 새 기계를 주실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놀라게 만들 것입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내가 남긴 성경구절]
[이사야43장]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8 Forget the former things; do not dwell on the past.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19 See, I am doing a new thing! Now it springs up; do you not perceive it? I am making a way in the desert and streams in the wasteland.
2.11
여러분의 자녀나 학생, 심지어 이웃들을 당신의 판박이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그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기관으로서 각기 다른 역할을 감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서도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 하며 무관심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그가 여러분과 다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같은 유기체의 일부임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여러분과 같은 유기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 여러분은 개인주의자가 됩니다. 반면에 그가 여러분과 다른 기관이라는 것을 잊을 때, 각자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을 획일화하고자 할 때, 여러분은 전체주의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체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개인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내가 남긴 성경구절>
[데살로니가전서5장]
16 항상 기뻐하라
16 Be joyful always;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7 pray continually;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8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2.12
구속(救贖)받은 사람은 지금 이 땅 위에서도 개선된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종국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개선된 모습을 갖추게 되지만, 그럼에도 개선이 곧 구속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피조물들을 아들로 삼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단순히 옛 사람을 좀더 낫게 개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말에게 더 높이 뛰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말을 아예 날개 달린 동물로 변신시키는 일과 같습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내가 남긴 성경구절>
[로마서 8장]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5 For you did not receive a spirit that makes you a slave again to fear, but you received the Spirit of sonship. And by him we cry, "Abba, Father."
2.13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으면 사람의 도움도 없습니다.그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우리가 ‘신앙생활’로 여기는 부분을 통해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자연을 통해서도,우리의 몸을 통해서도,책을 통해서도,때로는 반기독교적으로 보이는 경험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던 젊은이가 실은 자신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교회에 그만 다니기로 할 경우–부모를 속 썩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정직해지고 싶어서 이렇게 할 경우–그리스도의 영은 그 전 어느 때보다 그에게 더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 C.S.루이스<순전한 기독교>
2.16
한 평범하고 순진한 그리스도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그는 지금 이런 기도를 하게 하신 분 또한 하나님이심을, 즉 자기 속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참된 지식은 하나님이셨다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는 것,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지금 자기 옆에서 기도를 돕고 계시며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지금 이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대상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 입니다. 또한 그가 기도하도록 밀어주고 있는 주체 –원동력 – 이기도 합니다.동시에 이 사람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 내지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 평범한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평범한 작은 침실 안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중적인 생명 전체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내가 남긴 성경구절>
[로마서8장]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6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빌립보서 4장]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6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7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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